라데온 레퍼런스 디자인 변천사 (ATI역사, 디자인변화, 명작과실패작)
라데온이라는 브랜드가 26년 전인 2000년에 시작됐다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저는 솔직히 이번에 제대로 들여다보기 전까지 "엔비디아 지포스의 경쟁 제품"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초창기 제품부터 HD 6000 시리즈까지 훑어보니,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지금의 라데온이 만들어졌다는 게 꽤 묵직하게 느껴졌습니다. 디자인 변화만 보려고 펼쳤다가 ATI 시절 이야기까지 붙잡고 읽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 라데온 레퍼런스 디자인 변천사 |
ATI 시절, 라데온의 시작과 첫 번째 명암
ATi 테크놀로지스(ATi Technologies)는 1985년 캐나다에서 설립된 회사입니다. 인텔, AMD, 엔비디아가 모두 미국 기업인 것과 달리 유일하게 캐나다 국적의 GPU 설계사였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1999년까지는 원더(Wonder), 마하(Mach), 레이지(Rage)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영상 재생 가속 분야에서 강점을 쌓았고, 마침내 2000년 최초의 라데온 DDR을 출시합니다.
최초의 라데온은 GPU 코드네임이 R100이었는데, 이전 세대 레이지 시리즈의 연장선 느낌이 강했고 당시 지포스 2 GTS에 미치지 못하는 성능으로 시장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기판 색도 녹색이었고, TDP(열설계전력, 즉 GPU가 최대로 발열하는 수준을 나타내는 수치)가 10W대에 불과해서 방열판과 쿨링팬이 아주 작았습니다. 솔직히 지금 보면 기판 하나 덜렁 있는 수준입니다.
2001년 라데온 8500이 나왔을 때도 상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출시 초기 드라이버 완성도가 너무 낮아서 게임 호환성이 엉망이었습니다. 드라이버(Driver)란 하드웨어와 운영체제 사이를 연결해주는 소프트웨어인데, 아무리 GPU 스펙이 좋아도 드라이버가 불안정하면 실제 성능이 제대로 나오질 않습니다. 이 실패가 이후 라데온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그리고 2002년, 라데온 9700 Pro가 등장합니다. 제가 이번에 읽으면서 가장 눈이 멈췄던 제품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당시 엔비디아는 지포스 4 시리즈를 라인업하고 있었는데, 라데온 9700 Pro는 지포스 4가 지원하지 않던 다이렉트X 9.0(DirectX 9.0,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그래픽 API로 GPU가 어떤 3D 기능을 처리할 수 있는지를 정의하는 규격)을 지원하면서 성능까지 압도적이었습니다. 엔비디아가 대응 제품으로 내놓은 지포스 FX 5800은 오히려 망작 소리를 들었으니, 2002년부터 2004년까지는 라데온이 하이엔드 시장을 쥐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때부터 기판 색도 빨간색으로 바뀌었고, 이 빨간색이 라데온의 아이덴티티로 자리잡게 됩니다.
HD 시리즈의 굴곡, 실패와 반등의 반복
2006년 10월, ATi는 AMD에 인수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다만 바로 AMD 라데온으로 이름이 바뀐 건 아니고, ATi라는 명칭은 2010년 HD 6000 시리즈 출시 전까지 유지됩니다. 인수되던 그 해에 라데온 X1950 XTX가 출시되는데, 현대적인 블로워(Blower, 공기를 한 방향으로 밀어내는 터빈 형태의 쿨러로 케이스 내부 열기를 직접 외부로 배출하는 방식) 구조를 도입하고 투명 아크릴에 빨간색을 입힌 디자인이 꽤 세련되게 느껴집니다.
2007년 나온 라데온 HD 2900 XT는 제가 읽으면서 안타까웠던 제품입니다. 512비트 메모리 인터페이스에 GDDR4 메모리, 1GB 용량까지 야심차게 등장했는데, 정작 지포스 8800 GTX보다 성능이 낮으면서 소비전력은 30% 이상 높았습니다. 온도, 소음, 성능 삼박자가 모두 처참했다는 평가를 받은 제품입니다. 스펙 숫자만 크다고 좋은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반등은 2008년 라데온 HD 4870에서 이뤄집니다. 이 제품이 왜 의미 있었냐면, 스펙 경쟁이 아니라 가격 대비 성능으로 시장을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하위 모델 HD 4850이 지포스 9800 GTX와 동등한 성능을 내면서 가격은 100달러나 저렴했습니다.
- 상위 모델 HD 4870은 9800 GTX보다 성능이 높으면서 가격은 동일했습니다.
- 엔비디아는 결국 9800 GTX와 GTX 260 가격을 인하하고 GTX 275를 추가 출시하는 등 방어에 나서야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세대가 "가성비 라데온"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시점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HD 4870은 최초로 GDDR5 메모리(그래픽 전용 고속 메모리 규격으로, GDDR4 대비 대역폭이 크게 향상됨)를 탑재한 제품이기도 합니다. 이 기술 선택이 이후 HD 5000 시리즈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기반이 됩니다.
2009년 HD 5870은 라데온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페이지 중 하나입니다. 엔비디아가 TSMC 40nm 공정 수율 문제로 GTX 400 시리즈 출시가 지연되는 동안, AMD는 먼저 다이렉트X 11(DirectX 11, 테셀레이션 등 고급 그래픽 효과를 처리할 수 있는 차세대 그래픽 API)을 지원하며 HD 5870을 정상 출시합니다. 수요가 너무 높아서 2009년 한 해 동안 물량 부족까지 겪을 정도였습니다. 이때 AMD가 여유롭게 출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HD 4000 시리즈에서 40nm 수율 문제를 일찌감치 파악하고 차세대 설계에 미리 대비했기 때문입니다. 실패에서 배운 교훈을 제대로 활용한 사례입니다. AMD 공식 그래픽 제품 페이지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라데온 라인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 변화, 발열이 외형을 바꿨다
이번에 레퍼런스 디자인 변천사를 보면서 제가 예상 밖이었던 부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디자인 변화의 핵심 동인이 "멋"이 아니라 "발열"이었다는 점입니다. 2000년대 초반 제품들의 TDP가 10W대에 불과했던 것이, X800 시리즈 시절에는 100W에 육박하면서 2슬롯 쿨러가 필수가 됩니다. 쿨러가 커지니 디자인을 입힐 공간이 생기고, 그래서 아크릴 커버에 로고와 무늬를 넣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색상 변화도 흥미롭습니다. 최초 라데온은 녹색 기판이었고, 9700 Pro에서 빨간색 기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 2008년 HD 4870 X2부터 기판과 쿨러 커버가 검은색으로 전환되고, 빨간색은 포인트 컬러로 내려앉습니다. 이후 라데온 레퍼런스 디자인은 이 검은색 베이스를 기조로 이어가게 됩니다.
HD 5000 시리즈에서는 풀 메탈 백플레이트(Back Plate, 기판 뒷면을 덮어 보호하고 열 분산을 돕는 금속 커버)가 처음 도입됩니다. 이전에도 백플레이트가 없진 않았지만, 기판 전체를 덮는 디자인 목적의 백플레이트는 이때가 처음입니다. 지금은 중급 이상 그래픽카드에 백플레이트가 당연히 들어가지만, 당시에는 꽤 고급스러운 마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HD 6000 시리즈에서는 듀얼 바이오스(Dual BIOS, 두 개의 펌웨어를 탑재해 하나가 손상되어도 다른 것으로 복구 가능한 기능)가 레퍼런스 카드에 도입됩니다. 원래 안전 장치 목적이었는데, HD 6950에 HD 6970 바이오스를 플래싱하면 비활성화된 코어가 살아나서 사실상 상위 모델로 업그레이드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커뮤니티가 들썩였습니다. AMD GPUOpen 공식 페이지에서 AMD 그래픽 기술 관련 자료를 더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결국 AMD가 리비전을 통해 이 방법을 막긴 했지만, 사용자들이 직접 하드웨어를 탐구하게 만든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남아 있습니다.
라데온 레퍼런스 디자인의 변천을 보면, 결국 기술 발전의 흔적이 외형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드라이버 실패에서 명작 9700 Pro가 나왔고, 40nm 수율 문제에서 HD 5870의 성공이 나왔습니다. 이번 1부가 HD 6000 시리즈에서 마무리됐는데, 이후 GCN 아키텍처(Graphics Core Next, 테라스케일을 계승한 AMD의 통합 셰이더 기반 GPU 아키텍처)로 전환되는 2부가 어떤 디자인 변화를 보여줄지 개인적으로 기대가 됩니다. 그래픽카드를 단순히 성능 수치로만 봤던 분이라면, 이런 역사 흐름을 한 번 따라가보는 것도 꽤 다른 재미를 줄 겁니다.
이번 글을 보면서 라데온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그냥 엔비디아랑 경쟁하는 그래픽카드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긴 역사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처음부터 잘나갔던 게 아니라 성능도 아쉽고 드라이버 문제까지 겪으면서 여러 번 실패했다는 점이 의외였습니다. 그래도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9700 Pro나 HD 4870 같은 좋은 제품을 만들어낸 걸 보니, 꾸준히 발전해 온 브랜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무조건 최고 성능만 고집한 게 아니라 가성비를 앞세워 소비자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점도 인상 깊었습니다. 또 디자인이 멋을 위해 바뀐 게 아니라 발열과 기술 발전 때문에 자연스럽게 변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평소에는 성능표만 보고 그래픽카드를 비교했는데, 이제는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까지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니 라데온이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 참고: https://quasarzone.com/bbs/qc_plan/views/40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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